1984년 12월호 샘이깊은물 「이 사람이 사는 방법」

1984년 12월 샘이깊은물 표지

이 사람이 사는 방법

도예가 김 익영 씨

글/김명곤(뿌리깊은 나무 전 기자) 사진/이 정진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가장 깊이 관찰해서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도예가 김 익영 씨. 일을 할때의 그는 나이를 잊은듯이 생기에 넘쳐 있기 일쑤이다.

그가 작업실에서 흙을 보듬어 안고 그릇을 빚는 모습은 마치 아기를 안은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섬세해 보인다. 그래서 어떤이가 독신인 그를 가리켜 “조선 백자하고 혼인해서 현대를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그도 이따금 “그릇”을 잊어 버리고 제자들과 어율려 술을 마시고 흘러간 옛노래를 불러 보기도 하며 산에 올라 목숨 없는 바윗덩이를 쓸어 보기도 한다.

김익영 씨는 나이가 쉰에 이른 여자이지만 가정이 없다. 그를 돌보거나 그가 돌보아야 할 식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같은 나이에 이른 수많은 한국 여자들 중에서 “아무개 엄마” 도는 “아무 댁”으로 불리지 않는 얼마 안 되는 여자에 든다. 그리하여 그는 “도예가 김 익영”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함으로 돌아간데에서 우러나온다. 형태는 매우 순수하고 간단하며 그림은 대체로 대여섯번의 붓놀림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복잡하고 기이한 형태가 없다. 정교하고 현란한 색채는 아예 알지 못하는 세계이다. 그들은 면밀하고 복잡한 무늬를 그려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더 진보함에 따라 일정한 그림조차 그리지 않는다. 다만 두세번의 분방한 붓놀림만으로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 곰꼼한 기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수법이었다. 도공은 그야말로 천진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릇을 빚었다. 그들에게는 걸작에 대한 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의 법칙 곧 자연으로 돌아감이 거기에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 땅의 예술 세계에 반한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 사람이 식민지 시대에 펴낸 「조선의 예술」이라는 책에는 이렇듯 조선 백자나 그것을 만든 솜씨를 예찬하는 글이 길게 씌어 있다.

이 글이 세상에 나왔던 무렵만 하더라도 조선 백자를 만드는 도공은 사회의 하층 계급인 천민에 지나지 않았다. 곧 그들은 먹고사는 방편으로 그릇을 만들었다. 그러니 예술가라는 생각도, 걸작을 만들겠다는 욕심도 있었을 까닭이 없었다. 그저 생계의 수단으로서, “그야말로 천진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릇을 만들었을 터인데, 야나기 무네요시와 같은 꽤 극성스러운 호사가들을 만나 화려하고 복잡하고 찬란한 그리고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언어들의 덕을 입어 “위대한 예술가”로 뒤늦게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어느덧 그릇을 손수 빚어서 만드는 사람을 “도공”이 아니라 “도예가”로 부르게 되었고, 남자만이 하던 그릇 만드는 일에 여자도 끼어들수가 있어 몇 안 되는 도예가 중에서 한 전문가의 말을 빌면,”김 익영”과 같이 조선 백자를 현대화시키 는데에 뛰어난 감각과 재능과 기술을 고루 갖춘 참으로 바람직한 도예가”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김 익영씨가 만드는 자기는 대개 흰빛갈을 띤다. 그러나 희다고 해서 그냥 다 희기만 한 것은 아니다. 푸른기가 도는 청백색도 있고, 계란색이 도는 난백색도 있고, 회색이 도는 회백색도 있고, 우유빛이 도는 유백색도 있다. 다만 “예전에는 그런 다채로운 하얀색에 빠져서 이것 저것 시도해 보았으나 요즈음에는 단순하고 순수한 순백색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희디 흰 색을 많이 쓰고 있다.

그가 만드는 자기를 각별히 좋아한다는 어떤 사람은 그의 “그릇 세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 도예가 중에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가장 깊이 관찰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조선 백자의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하지 않고 백자의 혼을 현대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데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곧 그는 조가지 속에 ‘온고 지신’을 담을 수 있는 드문 도예가다.”

이런 평가를 빌지 않더라도 실제로 그가 빚은 그릇들을 보면 조선 백자와 닮은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와 빛깔 속에서 어딘지에서 모르게 풍기는 현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릇들은 진열대 위에 올려 놓고 바라보며 눈으로 즐기기보다는 그 속에 뭔가를 담아서 손 가가이에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한다.

“쓸모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입니다. 전통 도자기라고 해서 무겁고 두껍고 비실용적인 것이좋을 수는 없어요. 쓰기 좋고 보기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지요. 저는 오랫동안 기능과 아름다움이 일치된 도자기를 만들려고 애를 써 왔어요.

처음에는 그런 노력이 마음 먹은 대로 안 되어 “똥이 안 빠진” 곧 무겁고 두꺼운 그릇을 빚기도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쓸모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이처럼 자신있는 도예가로 “성공”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공이 크다고 한다.

“저는 아버지가 주무르는 대로 살아온 사람이예요. 아버지가 ‘이리 가라’하시면 이리 갔고, ‘저리 가라’ 하시면 저리 갔지요.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못 다 이루신 삶의 성취를 저한테서 이루어 보려고 무진 애를 쓰셨어요. 이렇게 저는 아버지의 손에서 만들어졌지만 그게 잘못 됐다거나 후회스럽게 여겨지지 않아요.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기 대문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된 셈이지요.”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의 아버지 김성구는 성격이 괴팍하고 고집이 세고 엄격하고 무서워서 사람들이 “벤찡”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옮기면 “괴짜”쯤으로 되는 이 일본말 별명에 어울리게 부산 상업 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때에 있었던 식산 은행의 대부계에서 일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근무처인 원산에서 청진이 고향인 이 주학이라는 처녀를 만나 혼인한 지 얼마 뒤에 월급쟁이 생활을 내던지고 원산에서 이십리쯤 들어간 시골에 터를 넓게 잡고 엉뚱하게 육종학 연구라는 것을 시작했다.

온갖 식물이 우거진 숲 속을 돌아다니며, 꽃을 찾아 붓으로 꽃가루를 옮겨 주는 일에 자주 골몰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오녀일남의 둘째딸로 자란 그는 한눈 팔지 않고 농장과 학교 사이만을 오고가던 “모범생”이었다.

해방이 되자 넓은 땅을 가진 대지주라 하여 구박을 받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식구를 이끌고 월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터를 잡은 그들은 정릉에 땅과 집을 사서 살게 되었고, 아버지는 다시 충청남도 대천에 땅을 마련해서 서울과 대천을 오가며 육종학 연구라는 것을 계속했다.

그릇을 빚는 데에 쓰일 재료들이 수북이 쌓인 그의 집 아래층의 좁다란 골마루. 이 골마루 끝에 그의 작업실이 있다. 그곳에서는 “조수” 몇명이 앉아서 그가 미리 해 둔 지시에 따라 흙을 빚기도 하고, 물레질을 하기도 하고, 초벌구이한 그릇에 “유약”을 바르기도 한다.

그가 이화 여고 일학년 학생일 때에 육이오 전쟁이 일어났는데, 집안에 쌀도 한두말 밖에 없고, 돈도 한달 생활비가 채 못 되게 달랑거리는 처지에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두 불러 앉혀 놓고서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다. 차례대로 자식들의 손을 만지면서 손금을 보고 난 아버지는 “너희들 모두 죽지 않는다. 손금에 그렇게 써 있어. 그러니 나는 대천에 가서 일을 볼 테니 너희들은 여기 남아 있거라”하고서 혼자 훌쩍 대천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 통에 어린 형제들은 경기도 소사에서 복숭아를 이고 와 팔며 “죽을고생”을 했다.

도는 물레를 차고 앉아 “성형”작업에 골몰해 있는 김 익영 씨. 그는 기능과 아름다움이 일치된 도자기를 만들려는 일이 마음 먹은 대로 안 되어 “똥이 안빠진”무겁고 두꺼운 그릇을 빚은 적도 있으나 이제는 스스로 “쓸로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그릇 세계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벤찡” 아버지는 둘째딸이 이화 여고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너는 농예 화학을 전공해서 농업에 이바지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농업 대학은 수원에 있어서 통학이 불편하니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진학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화공과에 진학한 김 익영씨는 대학에서도 또한 “모범생”으로 지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아버지는 다시 “너는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어 남한에서는 농업보다는 공업에 치중해야 한다. 공업 중에서 요업 산업이 머지 않아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시집가서 앞마당에 가마만 놓으면 자기 일을 할 수 있고 여자로서 떳떳하게 가정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요업을 공부하거라”고 명령을 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중-고등학교에서 미술반원으로 활약했던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좇아 홍익 대학교 공예 미술학과 삼학년에 학사 편입이란 것을 했다. 그곳에서 한해를 공부한 뒤에 우수한 학생 한명을 뽑아 미국에 한해 동안 유학시키는 이른바 국비 장학생에 뽑혔다. 그 무렵에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미국에 갔다와서 나라에 봉사하지 않으려면 애당초 갈 생각을 말아라”는 명령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미국 뉴욕 주립 알프래드 요업 대학원에서 한해의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고국에 돌아가려고 하자 그곳의 교수들이 “작업장도 따로 마련하고 월급도 줄 테니 두세해 더 공부하고 가시오. 김씨는 화공학을 전공해서 도예 연구에 이상적인 학문 배경을 가졌으니 이곳에서 좀더 연구하시오”하며 붙잡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한국 정부에 외국 체류 연기 신청을 냈는데 때마침 오일륙 혁명이 일어나서 나라 형편이 어수선했던 탓으로 연기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한 주일에 한번씩 그는 가회동에 있는 한국 미술관에 모인 아낙네들에게 도자기 빚기를 가르친다. 욕심 같아서는 이런 도예 강습 같은 덜 창의로운 일을 떠나 조용히 숨어서 “작품 제작”에 빠져 지내고 싶지만 그것이 쉽게 못 이룰 일임을 그는 잘안다.

돌아온 뒤에 모교인 홍익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싶어했지만, 자리가 주어지지 않아 한동안 일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국립 박물관 미술과 연구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조선백자와 비로소 가까이 만나게 되었으니, 그 체험은 그의 그릇 세계를 온통 지배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버나드 리치라는 꽤 이름난 도예가가 강의 시간에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길이 현대 도예가의 길이오” 하며 조선 도자기를 격찬하기를 거듭했었는데, 겨우 고려 청자나 머리에 들어 있던 그 시절에는 그 말의 깊은 속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가 조선 도자기를 손수 보고 만지고 하는 동안에 그 아름다움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그와 함께 “이런 좋은 그릇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골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자 가마에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다니며 흙을 만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너도 나도 도예를 한다 하여 이천이니 여주니 사방에 가마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는 이천에 하나가 겨우 있었지요. 포장도 안 된 길을 두어 시간 버스에 흔들리며 터덜거리고 가면 기운이 다 빠져요. 그곳에서 가마 주인집 아이들 하고 자면서 일을 했어요. 그때에 먹은 김치가 너무 맛있었는데 지금도 그 맛이 잊히지 않아요.”

그런 세월을 세해쯤 보내고 있을때에 미국에서 공부하던 때의 스승이었던 다니엘 로스라는 도예가가 일본에 교환 교수로 왔다가 한국에 들르게 되었다. 이천의 가마도 찾아가 보고 한국 도예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도 한 그는 “한국에서 도예를 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어렵겠소. 일본 교또 시립 미술 대학 학장에게 추천을 할테니 그곳에 초청 강사로 가서 연구를 하시면 어떻겠소”하고 제의를 했다.

그 말에 따라 일본에서 한해를 보낸 뒤에 그 교수의 권유로 미국으로 다시 가려고 했던 그는 나라의 여행 승락이 뜻대로 떨어지지 않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가 1965년이었는데 서른한살의 노처녀 도예가는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다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싶어했지만 도예과가 있는 서울 대학이나 홍익 대학에서는 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무역진흥 공사에서 디자인 개발의 일을 맡아서 몇해를 보내게 되었다. 공예품의 디자인이나 염색 공예의 일거리를 맡아 했는데, 그 틈틈이 그릇 만드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아 1975년에는 개인전을 두 차례나 열었고, 그 해에 국민 대학 조형학부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 뒤로도 꾸준히 그릇을 만들어 1980년까지 개인전을 세 차례 더 열었고 1983년에는 도꾜 화랑의 초대를 받아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가 세상에 도자기를 선보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빛깔과 형태에 반하고 솜씨를 인정하게 되어 이제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앞마당에 가마를 놓고 사는” 생활은 원없이 누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시집가서 놓아야 할 가마를 시집을 가지 않은 노처녀의 집에 놓고 사니 세상 떠난 아버지가 아시면 그다지 반기지는 않을 듯하다. 어떤 사람은 그를 가리켜 “조선 백자하고 혼인해서 현대를 사는 사람”이라고 하며 그의 독신 생활을 높이 치기도 하지만 그는 적어도 그릇과 혼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는 독신주의자는 아니예요. 지금이라도 뜻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혼인해서 살고 싶어요.”

이따금씩 작업장을 떠나 어머니가 살고 계신 서울 구기동의 풍치 좋은 집에서 자 본다. 옷도 늘 입는 회색과 감색 같은 점잖은 것말고 젊고 밝게 보이는 것을 입어 보려고 애쓴다. 일이 아무리 즐거워도 그 즐거움이 한곳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이런 작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말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대꾸하기 귀찮아서 입막음으로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그동안 “뜻이 맞는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그를 뜨겁게 사랑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던 남자가 있었고, 또 일본에 가 있던 때에도 서로 애타게 보고 싶어하던 “좋은 사람”이 있었다. 다만 “결혼 운이 없는 탓인지” 혼인 말이 나올 때면 꼭 공부 때문에 어디를 가게 되거나 무슨 중요한 일이 함께 걸리게 되어 둘 중의 하나를 뒤로 미루어야 하는 문제가 생겼고, 그럴 때마다 그의 마음에는 혼인하면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채로 자신을 희생하고 남편에게 봉사하는 생활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고, 또 무엇보다 자신은 아버지의 손에서 “만들어진” 수동적인 사람인데 이번에는 남편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혼인 문제만 나오면 주저하다가 늘 다음으로 미루었다고 한다.

“만일에 제가 여자 대학교에 다녔더라면 혼인했을지도 몰라요. 남자 대학에 다니다 보니까 남자도 별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데이트를 해도 이성이라기보다는 친구로 느껴졌지요. 또 워낙 제 성격이 차갑고 쌀쌀맞았던 모양인지 학교 안을 지나가면 남학생들이 ‘어 춥다, 어 춥다’하고 놀려 댔어요.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제 생애를 희생해서 바칠 만한 남자를 아직 못 만난 탓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는 혼인할 나이를 넘겼기는 하나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만 만나면 키, 용모, 돈, 학력 같은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지금이라도 혼인하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 말까지도 입막음으로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가만히 듣고 있느라면 그가 삶의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나이가 들수록 성숙하고 부드럽고 여성다운 눈을 가지게 되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공부 벌레요 일등주의 자요, 아버지가 제시한 외길을 한눈팔지 않고 곧장 걸어온 그가 요즈음에 들어 아침부터 밤까지 쉴새없이 일만으로 이어지는 하루하루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기 시작했다는 말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요즈음에는 제 사고가 너무 외곬으로만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이 아무리 즐거워도 그 즐거움이 한곳으로 치우친 즐거움이 아닌지, 생활을 좀더 다양하게 하여 제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릇”을 잊어 버리고 다른 것에 눈을 더 돌릴 궁리도 남모르게 해 본다. 이따금씩 작업장을 떠나 어머니가 살고 계신 서울 구기동의 풍치 좋은 집에서 자 보기도 하고, 대학의 제자들이 찾아오면 응접실에서 윷놀이도 하고, 술도 마시고, 화투도 치고, 흘러간 옛노래도 불러 본다. 그리고 옷도 회색과 감색 같은 칙칙한 빛깔에서 벗어나 젊고 밝게 보이는 옷을 입어 보려고 애를 쓴다. 드디어는 평생에 한번도 입어 보지 못한 빨강색 옷을 입어보려고 큰 맘을 먹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고작 자주색 목도리를 지난 가을에 하나 샀다.

거기다가 이제 나이도 적지는 않으니 건강을 돌보는 데도 힘쓰자고 생각하고 토요일마다 노처녀 교수 친구 몇명과 함께 등산을 간다. 그는 산목련 나무와 개후박나무의 차이를 잘 알 만큼 식물에 관해서도 눈이 밝고, 남이 안 보는 후미진 구석의 자연에 대해서도 관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등산길에서 살펴보는 여러 가지 나무와 풀잎, 잔돌, 이끼 같은 것들은 그에게 많은 기쁨과 영감을 선사한다. 

두달마다 돌아오는 서울 공대 화공학과의 동창회에 나가 오래 정든 친구들을 만났다. “너는 농업에 이바지하는 일을 해야하는데 농업 대학은 수원에 있어서 통학이 불편하니 서울대 공대 화공과에 진학해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좇아 그는 그 과에 들어갔다. 그가 한 이 화공학 공부는 도예 연구에 이상적인 학문 배경이 되고 있다.

또 물레 앞에서 오랫동안 한 가지 자세로 일을 해 버릇하여 몸이 굳어 부드러움이 없어지고 오른팔 쓰기가 거북스러워져서 “신호가 오는 것 같아” 몇달 전부터 골프를 시작하기도 했다.  아직은 스스로도 골프가 사치스러운 운동인 것으로 여겨지는 탓에 남에게 드러내 놓기를 부끄러워하지만, 그래도 그 덕택에 몸 쓰는 일이 훨씬 수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그릇”을 조금도 버리지는 못한다. 오히려 더 거기에 가까이 가려고 몸부림치는 편이다. 얼마 전에 한국 방송 공사가 연 “한국 현대 도예 8인전”에 그릇을 내고 국민 대학 학예부의 전시회 일도 돕느라고 일에 부대꼈던 그는 11월 말까지 학교에 내놓을 논문 한편을 써 놓은 뒤에 올 겨울에는 그의 예술 세계를 더 다지려고 마음 먹고 있다. 그동안 “생활 도자기”와 “작품 도자기”를 반반쯤의 비율로 만들어 왔다는데 이제 생활 도자기는 대학에서 조각공부와 디자인 공부를 한 그의 남동생이 맡아서 꾸려 가고 있는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대화리의 가마에서 생산하도록 하고 자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작품”에만 골몰할 생각이다.

“양식있는 작가라면 도자기의 값 문제도 생각해야지요. 생활 도자기는 어차피 가정에서 쓰는 거니까 대량 생산은 못해도 중량 생산 정도는 해서 되도록 싼 값으로 보급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생활 도자기의 값은 꽤 비싼 셈이에요. 그래서 일산 가마가 잘 운영되면 생활 도자기는 아예 그곳에서 더 싼 값에 생산하도록 독립시키고 저는 작품에만 신경 쓰려고 해요.”

사실은 그는 이런 생각을 좀더 일찍부터 해 왔다. 그래서 올해를 “고민하는 해”로 정하고 지난 여름은 땀띠에 시달리면서 오로지 물레 앞에서만 긴시간을 보냈는데 아직도 다섯해쯤은 더 고민을 해야 결실을 맺을 듯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욕심 같아서는 한 주일에 닷새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학교일이나 한 주일에 한번씩 아낙네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는 도예 강습 같은 일상적인 일을 떠나 조용히 숨어서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싶지만 그것이 쉽게 못 이룰 일임을 잘 안다. 아뭏든 그는 도자기 만드는 일이 워낙 “백번 머리 속으로 부대끼는 것보다는 한번 몸으로 부대끼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 몸으로 부대낄 준비를 하느라고 그릇 구울 흙부터 새롭게 마련하고 올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국민 대학의 교수 연구실. 얼마 전에 한국 방송 공사가  연 “한국 현대 도예 8인전”에 그릇을 내고 국민 대학 학예부의 전시회 일도 돕느라고 부대꼈던 그는 11월 말까지 학교에 내놓을 논문 한편을 써 놓은 뒤에 올 겨울에는 그의 예술 세계를 더 다지려고 마음 먹고 있다.

금원 – 흔히 비원이라고 한다 – 서쪽 담벼락에 외지게 붙어 있는 종로구 와룡동의 그의 집은 백자를 만드는 사람의 집답게 벽이며 천장이며 굴뚝이며가 모두 하얗게 칠해져 있다. 까치 그림 민화 몇점과 난초나 어린 대가 심긴 화분 몇개가 놓인 문간을 거쳐 들어가는 아래층 방에는 촛대, 오리, 향로, 찻잔, 밥그릇, 술잔, 꽃병, 항아리, 필통, 찬그릇, 양념그릇, 접시 같은 흰 자기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사랑방과 전시실을 겸한 이층 방- 거기에서는 금원 뜨락이 대려다보인다 – 에도 아래층 방보다는 한결 가지런하기는 하나 흰 자기들이 공간을 메워 놓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돈궤, 편지 고비, 기러기, 민화 같은 옛 물건들 몇점이 놓여 있어 주인의 가슴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엿보여 준다.

“박물관에 근무할 때부터 공부 삼아 고물들이 즐비한 인사동 출입을 시작했는데 교과서를 산다고 생각하고 조형 공부에 도움이 될 것들을 골라서 사 모으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좋은 물건 보고 가면 눈앞에 삼삼 어려 밤중에 잠을 설치다가 석달 할부로 사기도 할 만큼 푹 빠졌었지요. 하지만 제가 산 것들은 대부분이 어느 한쪽이 깨지고 망가진 것들이라 값나가는 게 없어요.”

사랑방과 전시실을 겸한 그의 집 이층방. 창 밖으로 흔히 비원이라 부르는 금원 뜨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창틀에 놓인 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민예품에 드는 나무 오리이다. 그는 이따금 한가한 시간을 만들어 스스로 빚고 구운 찻잔을 앞에 놓고 이렇게 쉰다.

그의 집 앞마당에는 가스 가마 두대를 놓은 “가마실”이 있고, 집 뒤켠에는 규산이니 실리콘이니 하는 그릇 재료들이 수북이 쌓인 좁다란 골마루 끝에 작업실이 있다. 그의 일을 돕는 “조수” 몇명이 앉아서 그가 없을 때에도 그가 미리 해 둔 지시에 따라 흙을 빚기도 하고, 약간 마른 그릇의 “굽”을 깎기도 하고, 초벌구이한 그릇에 “유약”을 칠하기도 하는 곳이다.

그는 형광등 불빛이 어른거리는 그 작업실에서 물레를 “차고” 앉는다. 반죽한 흙을 판 위에 올려 놓고 발로 물레를 돌리며, 손으로는 흙을 보듬어 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릇을 빚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고 기쁨에 차 있다. 그는 오늘도 서울 한복판의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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